나는 무서운 엄마다. 나는 내 딸에게 아주 단호하고 엄하고 무섭게 말하는 습관이 있다. 나는 무서운 엄마다. 나는 내 딸에게 아주 단호하고 엄하고 무섭게 말하는 습관이 있다. 친정 엄마도 나한테 그렇게 했는데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. 처음엔 이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자책하고 괴로워했다. ‘친정 엄마처럼은 절대 안 할 거야’라고 결심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. 그런데 이젠 자책하지 않는다.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, 안되었을 때는 ‘아, 또 실수했네’ 하고 넘기려 한다.
나는 무서운 엄마의 모습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. 왜냐? 그리 봐왔고, 배웠고, 익숙해졌기 때문이다. 내 모습을 부정하는 것은 나의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.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나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. 그럴 수밖에 없었던 친정 엄마의 상황과 그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답습한 나의 삶도 이해하고, 그럼에도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 내 현재 모습을 격려하고, 바뀌려 노력할 뿐이다. 그리고 그런 친정 엄마의 모습이 싫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지금 친정 엄마를 사랑하고 있고, 이렇게 잘 살고 있다.
그러고 보면 엄마로서의 나의 모습이 큰 문제일 것 같지만 어찌 보면 별문제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. 나는 그런 강압적인 엄마 밑에서 컸어도 반항을 하고 끝까지 내 뜻대로 할 수 있었고, 극렬한 반항기를 겪고 넘어섰으니…….
내가 무섭게 해도,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생각을 하는 아이……. 엄마인 나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아이……. 내 딸은 그럴 것이다.
어쨌든 결국 나는 잘 살고 있다. 고로 내 딸은 나보다 더 잘 살 것이다. 왜? 내가 친정 엄마보단 덜 무서우니까.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게 잘못이란 건 알고 있으니까. 그럼 된 것 아니겠나. 이렇게 가볍게 털어내고, 엄마께도 감사함만 생각하고, 내 딸에게도 고마운 것만 생각하고, 내 자신에게도 기특한 것만 생각하면 되는 게 아닐까.
이 글을 쓴 엄마는 정말 훌륭한 엄마다. 이 엄마처럼 해야 한다.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있지만 그 삶 속에서 극복하고 가정 꾸리고 아이 낳아서 그럭저럭 살고 있다. 그러면 건강한 것이다. 나는 나다.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면서 살고 있다. 우리 아이도 그렇게 살면 된다.
이 엄마의 딸은 당당하고 용기있고 멋진 여성이 될 것이다. 엄마의 ‘나는 괜찮아’ 하는 냄새가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도 ‘나는 괜찮아’가 되기 때문이다. 내 아이를 위해서 나는 괜찮아야 한다.